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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함께사는세상

공연을 보고

<이제 그만......> 후기

비류 2013.12.03 23:11 조회 수 : 1354

공연을 본 지 2주 가량 지났습니다.

 

처음 공연을 보고 남기려던 후기를 싹 지우고서 4마당에 관한 후기만 남깁니다.

 

연극과 친숙하지 않은 터라 졸지 않고 끝까지 다 본 것만 해도 스스로 대단하다 여깁니다. 더불어 함세상의 공연이 지루하지는 않았다는 것두요.

 

4마당을 요약하면, "청년이여, 욕망에 노예가 되지 말고 꿈을 가져라"더군요.

청년 스스로 '그래 꿈을 가지자'도 아닌 '꿈을 가져라'는 훈계.

마치 386세대가 지금 대학생을 바라보며 "우리때는 안 그랬어. 왜 그렇게 패기도 없어"라는 훈계처럼 말이죠.

대학진학률이 20%를 오락가락 하던 80년대 초반과 대학진학률이 80%를 넘긴 2000년대 대학생은 분명 그 사회적 위치가 다를텐데 말이죠.

 

훈계가 아닌 현상을 보여준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도 그렇게 볼 수가 없더군요. 주인공이 취직했다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은 삼성/현대/LG 정도의 대기업을 말하고 있는 거죠. 영문학을 전공한 대기업에 2등으로 취직하려면 서울소재 대학, 지방 국립대 이상의 학벌을 가져야만 그나마 보편성을 획들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 청년의 현실을 드러내기에는 인물 자체가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죠. 대기업 정규직 신규채용은 1%를 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수 청년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설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386세대가 바라보는 가상의 대학생이라면 가능할 따름입니다.

 

꿈을 가지라는 훈계 속에서 왜 자꾸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담론이 떠올랐을까요. 구조적 문제를 주체의 의지로 돌파할 수 있을까요.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가 아닌 보편성 속에서 말입니다.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담론은 청년의 고용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신자유주의의 유연한 통치방식에 공조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웃고 떠들고 즐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미시적 이야기 속에서 풍자와 해학을 그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거시담론을 이야기 한다면 더 철저하게 풀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서 1마당에서 던진 '행복한 삶을 위해 명확한 답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라는 대사는 작은 이야기 속 재미와 거시담론 사이에서 줄타기를 제대로 못한 알리바이에 불과했습니다. 연극이 어떤 명쾌한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 부분은 '공백' 또는 '침묵'의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 연극을 기대하며 감상 후기를 마무리 합니다.

 

““따라서 수치스러운 연극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철학 또한 존재한다. 수치스러운 철학이란 사변으로 병들어 있는 철학이다. 수치스러운 연극이란 미학주의로 병들어 있는, 연극성으로 병들어 있는 연극이다...”...곧 ‘해석’이었던 철학을 ‘변혁’을 위한 철학으로 바꾸기를 종용하는 권고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전혀 다른 층위의 정식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 효과』「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p.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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